1. 개요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동반 실종되었다가, 실종 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2. 상세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 아이들의 백골이 발견된 지는 21년이 흘렀지만 현재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다(#).
범인의 윤곽은커녕 피해자의 신원이나 행방조차 밝히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진 사건은 전국적으로 많이 보도되었지만, 이렇게 불가사의한 사건의 경우 당대의 이슈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수사 인력의 편중으로 인해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묻힌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대천 영유아 연쇄유괴살인 사건의 경우 개구리 소년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고, 범인과 범행 수법 역시 오리무중이지만, 개구리 소년 사건만큼의 수사와 관심을 받지 못해 인지도가 훨씬 부족한 실정이다.
이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전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끝내 범인을 찾아냈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은 범행 동기가 확실하고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었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아이를 유괴하고 협박 전화를 건 범인의 목소리를 성문 분석한 결과 이형호 군의 생모 쪽 사촌동생인 이상재(가명)와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성문은 개인에게 고유하므로, 비록 아이를 유괴한 범인이 따로 있고 다른 공범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협박 전화를 건 인물이 이상재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재에게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이유는 당시 이상재가 알리바이를 입증한 것과, 경찰 측에서 해당 사건의 범인을 1명으로 간주하고 수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그런데 두 사건과 정반대로 이 사건은 밀폐되지 않은 산속에서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과 대대적인 수색이 이어졌음에도 윤곽조차 잡지 못한 범인, 알려지지 않은 살해 이유, 그리고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불가사의 투성이었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미제사건 중 가장 의문점이 많은 사건을 꼽아보라면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언급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의문이 아닌 게 없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훤히 아는 인근 산이었다는 것과 흔적이나 범인의 정체, 살해 수법등 모든 것이 수수께끼와 같고 그래서 더욱 의혹이 들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3. 명칭
정확히는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일명 ‘개구리 소년’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당시 개구리와는 달리 도롱뇽을 잘 모르는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괴생명체로 오인할까 봐 일부러 인지도가 높은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구리와 달리 도롱뇽은 국내 서식지가 제한적인지라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도 아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다만 사건 당일 5명의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두를 주우러 간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간단하게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 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었으나,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4. 사망자[편집]
우철원(禹喆元): 국민학교 6학년
조호연(趙浩衍): 국민학교 5학년
김영규(金榮奎): 국민학교 4학년
박찬인(朴燦印): 국민학교 3학년
김종식(金鐘植): 국민학교 3학년
5. 사건 발생[편집]
1991년 3월 26일은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최초로 전국의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인 1991년 지방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이 날은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뽑는 날이었다. 광역자치단체 의원은 3달이 지난 6월 20일에 선출되었다.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現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3~6학년 어린이 우철원 군(6학년), 조호연 군(5학년), 김영규 군(4학년)(가장 늦게 발견), 박찬인 군, 김종식 군 그리고 김태룡 군(이 셋은 모두 3학년) 총 6명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 군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라고 핀잔을 줬다. [3].[3]
그 뒤, 우철원 군을 비롯한 6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 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향했다. 6명 가운데 김태룡 군은 같이 따라가려다가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라는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고, 아침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김태룡 군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범행을 면한 생존자가 되었다.
조호연 군의 형 조무연 군(당시 중학교 1학년)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라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는 김순남 아주머니가 9시쯤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김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과 지나쳤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 군과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1979년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라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 군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와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14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라고 증언했다.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라고 진술했다.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 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 씨와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 씨는 함 군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쯤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라고 생각했으나,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19시 50분에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사건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서구 중리동에 위치해 있던 가축 도살장(현재의 퀸스로드 쇼핑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목격 내용
6. 경과[편집]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로 인한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우를 범했다. 5명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던 데다, 애초에 5명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일시에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종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가 당시 14살이던 우철원이고 나머지는 모두 갓 10대에 들어선 상황이었다. 특히 박찬인, 그리고 김종식은 각각 11세, 10세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직 어린아이티도 벗지 못한 아이들이 가출이란 엄청난 일을 벌이기엔 나이가 너무나 어리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초등학교 아이 5명이 한날한시에 증발했다면 유력한 가능성은 유괴 아니면 가출인데, 딱히 유괴범으로부터 협박전화가 오지도 않을뿐더러,, 앵벌이 조직이 굳이 외딴 시골 마을에 찾아와 아이들을 깡그리 납치해갈 가능성은 낮았다. 번잡한 도시에서야 아이 1명이 갑자기 사라져도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는 아이 1명만 없어져도 마을에서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당시 시골에서는 '골목대장'의 말을 부모님의 말보다 더 듣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초등학교 6학년 '형님'의 말이라면 아이들이 이끌려 갈 수도 있기에 호기심에 타지에 놀러 갔다가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방향으로 초기 수사방향이 정해졌다. 1980년대 아이들에게 사랑받았던 히트영화 '호소자'를 보면 산골에 할아버지와 살던 어린 3형제가 염증을 느껴 다짜고짜 도시로 상경하다 범죄조직과 엮이게 되는 스토리였고 당시 시대상 역시 그와 비슷했기에,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정체불명 살인마의 소행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을 수 없어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수색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25개 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 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30만 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19,000여 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570여 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였다.
현상금이 많았던 탓에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경북 구미에선 목격 제보가 왔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됐다는 등의 제보도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또는 OO로 찾아와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치기도 했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며 부모를 놀리는가 하면, 정신이상 증세를 앓고 있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거나 부모가 자녀에게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이건 부모가 쓰레기인데, 이렇게 부모와 조사 중인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여 수사에 혼선이 생겼다.
다행히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 보자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각 기업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홍보에 진력했다. 그래서 전화카드나 담뱃갑은 물론 당시 어린이들이 즐겨 보던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삽입되었고, 그 외에 우유나 과자 포장에도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가 인쇄되었다.
특히 포항제철은 대구지방경찰청에 현상금 11천만 원을 기탁해 가며 전단 80,000장을 임직원과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도 대한항공과 한진고속 승객 및 임직원, 고객들을 상대로 100100만 장을 뿌렸다. 러키도 슈퍼타이 등 전 제품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붙이고, 수퍼타이 CF '미아 찾기 캠페인'을 통해 홍보했으며 국민신용카드도 1991년 11~12월까지 대금청구명세서를 담을 우편봉투에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를 실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미아찾기 캠페인 참여사로서 8888 담배에 아이들 사진을 삽입했고, 부산택시조합도 1992년 달력에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 제일제당, 기아자동차(現 기아), 남양산업, 남양알로에(現 유니베라. 1976년에 설립된 건강기능식품 및 화장품 제조회사로 국내 최초로 알로에를 시험재배한 회사), 대도제약(1962년 설립. 혈전 용해 치료제 '용심'과 어린이 영양제 '아토실''아도실'로 유명했다. 1997년 삼성정밀화학에 인수) 등지도 사보에 사진 및 명단을 실었다.(참고)
또한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 개봉)이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 《생방송 여론광장》- '얘들아, 어디있니?' 편(1991년 5월 4일 방영분)을 비롯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1993년》(1993년 3월 21일 방영분), KBS1의 《사건 25시》(1993년 6월 26일 방영분)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교출판에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를 출간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다. [4].[4] 또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까지도 제기되었다. 변종으로 아이들은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불러간 것이라는 개소리도 있다. UFO납치설은 지금 보면 뜬금없지만, 이 사건 즈음엔 "안녕하세요 지구어린이"란 괴작 서적이 크게 홍보하며 아이들에게 팔리던 시기였다. 책만 판 게 아니라, UFO가 녹음된 소리라며 비싼 정보이용료가 청구되는 ARS전화를 유도하여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갈취했을 정도이며, UFO 하면하면 UFO납치설도 빠질 리가 없으니 혹시 개구리 소년들도 UFO에 납치된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다"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경찰이 나환자촌까지 가서 수색하려다 한센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심리학자와 심령술사, 역술인들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경주 왕릉 매장설, 김종식 자택 매장설, 고속도로 교각 매장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어 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직접 수색을 포기했다.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2만여 장이나 뿌렸고, 이듬해엔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판명 났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 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건 이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모습과,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 응했던 모습을 보면 본래 그는 매우 건장한 체격이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해서 매우 건강했다고. 그런 그가 간암에 걸려 죽을 정도로 폭음을 했으니,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알 수 있다
유골 발굴 전인 2002년 9월,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라며 거짓 제보를 했는데 하필 유골 발견 전날에 들어온 제보라 제대로 엮였다.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했다. 이 몽타주가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의 범인의 것으로 알려져 돌아다니는데, 범인의 몽타주가 아니다.
결국 이 남성은 경찰서에 자수해서 체포된다. 이때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와 김기설 사건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 사건"이라는 주장하는 등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사해 보니 1010여 년 전 권투해서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 상태였으며, 서울역과 명동성당 등지를 전전하던 노숙자였다. (기자협회보, 연합뉴스)
7. 결말[편집]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무근 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새방골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구 육군 제50 보병사단50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실종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벌어진 실책이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달서경찰서는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당시 대구달서경찰서장이었던 김용판은 2012년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됐다. 2005년에 대구성서경찰서가 신설되어 현재 사건 현장은 대구성서경찰서 관할이다. 달서경찰서는 월배권 관할. 경찰은 무슨 의도였는지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서 현장을 훼손시켰다. 또 정확한 부검도,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파헤쳐낸 유골만 봤으면서도, "상식적으로 봤을 때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라든지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5].[5]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그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 꼴을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 그래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고 한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 데 사용하는 용접망치, 일명 깡깡이망치다.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고,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수사가 가능한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공소시효 배제라 한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수사가 불가능하다.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잡힐 가능성조차 안 보이며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체포 후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1.1. 왜 유골이 늦게 발견되었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동원되어 연간 3030만 명이 와룡산을 수색했는데, 장장 11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m 정도의 야산에 불과하고 산이 가파른 것도 아니라 완만한 산인 데다가, 정상까지 올라가 보면 그리 높지도 않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올라가는 수준밖에 안 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 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닌, 당시에 존재하던 저수지에서 반대쪽 능선을 지난 '새방골'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으로는, 1990년대 초를 기준으로 한국의 야산들 대부분이 녹화사업 전이라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1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뜨인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인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간 것에 대해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라고 유인했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당시 사건을 조사하던 김재산 국민일보 기자에 따르면,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했는데 정작 유골이 발견된 것은 세방골이었다. 아이들이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 수많은 인력과 돈을 낭비하게 만든 것은 물론, 아이들까지 늦게 발견하게 하는 데에 일조한 셈이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여론에서도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유괴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당시에는 살인 사건이라고 해야 원한 혹은 치정과 연관된 사건이 대다수였던 데다가, 아이들을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유괴였기 때문.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부모들의 성화를 못 견뎌 가출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살해당하고 암매장당할 가능성은 제기되지 않았고,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1.2. 5명의 아이들을 살해한 수법[편집]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범인이 1명이었다면 2~3명의 아이는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 다른 2~3명은 달아나거나 반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범행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기 어렵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실험을 통해서 '어른 1명이 5명의 아이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추측했다.
게다가 이 5명은 깡통이나 작대기 등을 들고 산과 들을 매일같이 뛰어다녀서, 운동 신경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다. 살해된 아이들 중에는 달리기 육상대회에 나갈 정도로 달리기가 빠른 아이도 있었으며 태권도를 익힌 아이들도 있었다. 또 초등학생들이라곤 하지만, 저학년이 아니라 최소 3~6학년생들이고 와룡산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운동신경을 지닌 남학생들인지라 어린이라고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을 어른 한 명이 모두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3대 영구 미제 사건 특집에서는, 범죄심리학자의 말을 통해 '아무리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5명이나 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축되는 면이 생긴다'라는 분석과, 범인이 1명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거나, 일시적으로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차에 아이들 중 일부를 먼저 발견하였고, 순차적으로 살해하였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일단 도롱뇽알을 채집하겠다며 나갔다고 했으니 장소에 도착해 각각에 한 구역을 맡기고 그곳을 찾아보라고 했을 것이고 자연히 자신들에게 맡겨진 구역을 탐색하다 이들 중 한 명이 우연찮게 범인에게 발견되어 희생된 후, 희생자의 행방이 궁금해 찾던 다른 아이가 발견되어 같은 방식으로 희생됐을 가능성도 유출해 볼 수 있다.
아이들 중 가장 힘이 세고 나이가 많은 맏형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찍힌 상흔만 무려 25군데나 발견됐는데, 이는 다른 소년들보다 범인에게 더 맹렬히 저항하다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두개골에 찍힌 'ㄷ''ㄷ'자 모양의 상흔들이 흐트러짐 없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이며, 이는 소년이 아직 살아있을 때 생긴 외상흔이라고 한다.
가장 막내인 김종식 군의 왼팔이 골절된 것은 범인이 소년들을 뒤에서 붙잡고 오른손으로 흉기를 내려쳤다는 가정 하에, 왼팔을 먼저 들어서 막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오른손잡이이며 소년들의 좌측 두개골에 나타난 상흔들만 봐도 우측에서 위아래로 강하게 내려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규 군의 옷소매와 단추는 찢어져있었으며, 강한 물리적 압력에 의한 것으로 매듭 역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기 위해 묶은 것으로 보인다. [1].[1]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에게는 특별한 외상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소년들이 차례로 희생되고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교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3. 매장 수법[편집]
《그것이 알고 싶다》를》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그 외에도 해당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들이 의외로 눈여겨보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찌어찌 아이들을 살해했다 쳐도 도대체 어느 세월에 어떻게 매장했냐는 것이다. 이후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수색작업에 탄로 나지 않을 정도로 깊게,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매장할 만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채종민을 비롯한 법의학자들은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아이들이 희생된 직후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결국 이 부분은 이 사건이 후술 할 프로파일러들의 의견처럼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는 부분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아무나 살해하고 매장할 목적으로 삽을 비롯한 도구를 들고 산에 갔으며 그 희생양은 5명의 아이들이었다는 것. 아이들을 살해하고 나서 바로 매장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미리 삽을 들고 산에 오르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1.4. 함승훈 군이 들은 비명소리[편집]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함승훈 군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함 군도 사건 당일 개구리 소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와룡산에 갔는데, "골짜기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라는 것이다. 이후 유골이 발견된 2002년, 대학생이 된 함 씨는 다시 이 방송의 인터뷰에 응했는데, "당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절대 잊지 못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와룡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피살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 주장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말도 대중적으로 통용되지 않던 때고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인식되지 못했다. 이유 없이 5명의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출, 혹은 불량배 집단에게 앵벌이 같은 노동력 갈취 목적으로 납치당했다고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는 바람에 제보의 허울을 쓴 온갖 장난이나 오인 신고 등이 빗발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경찰력이 분산되기도 했으나, 그 장난 전화들도 유괴범인 척하거나 실종자 본인인 척하는 게 대부분이었지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입에 담지 않았을 정도다.
또한 이 당시 사건 이후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도록 실종 혹은 납치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구리 소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점은, 당시 시대가 한 번에 다수의 어린이들을 아무 이유 없이 살인한다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방증한다. 1명이나 2명의 어린이라면 부모나 가족 관련 원한을 동기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실종이나 납치가 흔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함 군의 인터뷰를 계속 되뇌며 아들 걱정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함 군의 인터뷰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와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함 군은 11시 반 정도에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했으나 12시쯤 우철원 군과 같은 반 친구인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이 서로 만났다는 증언이 있고, 2시쯤 김이수 아주머니가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라는 증언도 있으며, 기타 12시 이후의 목격 증언이 있기 때문. 그러나 당시에 함 군은 시각을 정확히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점심 먹기 전이라는 이유로 11시 반일 거라고 말한 것이니, 시각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비록 상반되는 증언이라도 누군가는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수사를 해야 했지만 그 시기를 한참 전에 놓쳤다.
이 비명이 피해자들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산에서 본드를 흡입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라는 가설도 나왔다. 본드 흡입 시 증상 중에 하나는 비명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2].[2]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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